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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부고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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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정해봉

직업 퇴직 인하부고 교사

졸업회수 1회

졸업연도 1975년

남기는 글

나의 고등학교 시절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고등학교 입학전형고시가 있었던 시절이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정기고사(중간고사, 기말고사)의 1, 2학기 평균 성적이 95점 이상이면 당시 최일류 고등학교인 제물포고등학교, 93점 이상이면 인천고등학교, 91점 이상이면 동인천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는 성적으로 분류하여 고등학교 입시전형에 응시하였던 시절이다.


서울은 물론 전국적으로 고등학교를 입시전형으로 선발했던 시절에…. 서울 지역에서는 경기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가 일류 고등학교로 분류가 되었으며, 각 지역마다 일류 고등학교가 있을 시절이었다. 지금 현재에도 그 당시의 명문 고교로의 자긍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전통
을 준수하는 학교들도 많이 있지만 약 3년 뒤에 무시험 전형제도로 바뀌면서 명문고교의 위상이 많이 추락하여 모든 고등학교들이 평준화되고 있었다.


그 때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도 고등학생들이 많이 있었던지 전국적으로 고등학교 전형입시에 불합격이 되어 다시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배움의 열망과 갈망은 무척 크고 학부모님들도 자식만은 꼭 공부를 시켜 성공시켜 보겠다는 향학열은 전 세계적이었
다. 지금도 향학열은 전 세계적일 것이라고도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교사 신축 현장(1972)

 

 

 

 

 

 

 

 

 

 

 

 

그렇게 입시경쟁이 치열할 때에 전국에서 고등학교 입시전형에서 패배의 쓴 맛을 본 우수학생들을 위해 인하대학교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는 후기전형 고등학교로 개교를 하였다.
중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한 나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는 싶었지만 등록금을 낼 형편이 되질 않아 용산에 있는 철도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응시를 하였다. 성적은 우수하였지만 시력이 나빠 철도고등학교에 떨어져 의욕을 잃고 있을 때 사촌 형님께서 후기 전형으로 인하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당시에는 인하종합고등학교 : 보통과 3학급, 화공과 1학급)에 지원을 해 보라고 권유를 해 주셨다. 당연히 지원하여 다니고 싶지만 학비가 어려운 형편인지라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아버님께서는 사촌형님에게 나를 맡기는 조건으로 학비를 지원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던 모양이다.
당시 사촌 형님은 동인천에서 조그마한 서점을 경영하였을 때였다. 나는 그 곳에서 서점 점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주경야독을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일단 인하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입학전형서류를 준비하여 지원을 하였더니만, 우와! 놀라운 일이다. 전국에서 특히, 서울에서 일류 고등학교인 경기, 경복고등학교, 인천의 제물포, 인천고등학교에서 불합격된 우수 학생들이 대거 몰려들어와 경쟁률이 자그만치 5대 1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국적으로 후기 전형 고등학교는 경기, 서울 지역에 유일하게 모교 밖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당시에는 입학전형 전일에 예비소집을 하여 운동장에서 주의사항 및 고사실 안내 등을 하였었다. 입시전형 지원자들이 운동장에 모여들었는데 운동장에 새까맣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넓은 운동장을 꽉 메우고도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정말 장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장관이었지 당시에는 무척 떨리고 두려웠었다.
수많은 입시생들과 경쟁을 하여 240명의 합격자 안에 들어 합격을 하였지만 등록금이 걱정이었는데 아버님의 부탁을 받은 사촌형님께서 등록금을 주어 등록을 하여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커다란 복병이 있었다. 신설 고등학교답게 이른 아침 등교를 시켜서 늦은 밤까지 엄격하게 열성을 다해서 가르치는 학교였기에 방과후 자율학습은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학교의 방침이었다.
나로서는 커다란 복병이며, 무거운 짐이었다. 정규과정만 수업을 받고 일찍 하교하여 서점에 가서 서점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서점 점원역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담임 선생님이셨던 박종헌(지리과목 담당) 선생님께 사정 이야기를 하였지만 들어 주실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고 자율학습이 어려우면 다른 학교에 전학을 하던지 자퇴를 하라고 하셨다. 매달려 사정사정 이야기를 하였더니만 보호자를 한 번 뵙자고 하셨다. 아버님은 생활고에 허덕이시는 턱에 감히 말씀도 못 드리고 사촌형님께 말씀드려 담임선생님을 뵙고 상담을 하여 간신히 자율학습을 면제받게 되었지만 내심 걱정이 많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나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는 일하는 정말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는 입장이니 당연히 성적은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그것도 명문사학을 졸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줄로 알고 열심히 학교생활과 서점의 점원역할을 톡톡히 해 나가며 최선을 다하였다.


이제 내 이야기는 그만하고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의 생활 중 기억이 나는 특별한 몇 가지 일들을 떠올려 이야기 하려고 한다.
모교는 지금의 인하공업전문학교 자리에서 개교를 하였는데 입학 당시에는 본관 건물은 건축 중이라서 뼈대만 있고 철근이 얽혀 있었으며 건축자재가 많아 운동장 사용이 불가능 하였다. 교실은 인하대학교 도서관 자리는 중학교가 사용을 하였고 그 건물 아래 인하공대 실험실습실인 건물 A, B, C동을 교실로 임시 사용하었다. 운동장 끝자락에는 혜성보육원이 있었고 혜성보육원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있으며, 아주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서 주변이 말끔히 정리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체육시간과 교련시간에는 등교하면서 가지고 오라고 했던 구공탄 재를 실개천 주변에 던져 질퍽거리는 길을 보수하고 삽으로 실개천 및 주변 운동장 정리를 하면서 체육시간과 교련시간을 보냈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명문 고교로의 발돋음에 한 획을 긋는다는 포부로 열심히들 운동장 정지작업에 땀방울들을 많이 쏟아내고 있었다.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1회 졸업생으로서 흘린 땀방울에 마음 한 구석 뭉클함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전혀 체육활동이나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북한은 노동 적위대, 학생 적위대라고 하여 많은 시간을 군사훈련에 동원시키고 훈련을 시켜 오던 터라 대한민국에서도 교련시간이 많이 강화되었었다. 체육시간보다도 교련시간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총도 실총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분해조립은 물론 분열, 사열, 독도법 등의 군사훈련을 받았었다. 학생 조회시간에도 대대편성을 하여 마치 군인들처럼 군 생활 비슷하게 생활하면서 공부하였던 시절이었다.
매년 6월이면 지금 숭의동에 있었던 종합운동장에 모여서 군사훈련 시범대회도 하곤 하였다. 수류탄 투척, 분해조립, 각개전투, 시가행진 등등 마치 전쟁에 곧 투입이 될 용감한 군인들을 양성시키듯 대단하였다. 군사훈련시범 경진대회에 우승한 고등학교는 종합운동장에서부터 동인천역까지 시가행진을 하게 되고 인천 시민들은 길거리에서 시가행진을 하는 학생들에게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행진하는 군인들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맨 앞에서는 연합 브라스밴드가 주악을 울리며 시가행진을 하곤 하였다.
주악으로 인천기계공고, 경인여자상업고등학교, 인하사대부속고등학교가 연합하여 음악을 담당하였다. 앞의 두 학교는 실업계고등학교이고 물론 우리학교는 인문계고등학교였다. 개교 당시 故 조중훈 이사장님께서 직접 일본에서 구입한 최현대식 악기이며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야마하’ 악기를 가진 학교는 우리 밖에 없어서 항상 브라스밴드 주악은 우리학교 밴드부가 담당을 하였다. 지금도 밴드부에서 활동하였던 친구들은 곳곳에서 음악성을 발휘하여 좋은 음악가로 자리 잡고 있다.


학업도 다른 학교와는 색다르게 오전 7시 새벽별을 보고 등교하여 1시간 보충학습을 하고 1시간 자율학습을 하고는 정규수업 6교시를 하고는 오후에 자율학습을 하여 오후 9시에 달빛을 받으며 하교하는 등 모든 선생님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인재양성에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에 대학입시에서는 지역별 지원 가능한 자격을 부여하는 예비고사를 치렀는데 내가 고3이던 시절 예비고사 결과 우리 학교가 인천시에서 최우수 고교로 무려 98%의 합격률을 자랑하는 명실공히 명문 사학으로 우뚝 서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인천시교육청으로부터 최우수 고교 표창을 받은바 있다. 아마도 열과 성을 다해주신 선생님들의 노력과 학생들의 열정적인 학문 탐구로 일구어낸 쾌거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전국적으로 후기모집을 하여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입학을 한 것도 한 이유였겠지만, 당시 초대 교장이셨던 故 박용서 교장선생님께서 전국에서 유명하시고 실력이 뛰어나신 분들을 초빙하는 방법으로 그 때 당시 봉급 이외에 400%의 상여금을 더 주면서 훌륭한 선생님들을 모시고 온 덕택도 있었을 것이다. 인천시 최우수 고교로 선정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문고로 소문이 나고 모든 고등학교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전국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학교 방문을 하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에 온 정성을 다 하는 학교로 변모하였다.

 

학교 - 송도 간 마라톤대회(1970년대 전반)

 

 

 

 

 

 

 

 

 

 

 

 

 

오랫동안 기억이 되는 것 중 하나로 매년 학생의 날인 11월 3일을 전후하여 교내 마라톤 대회을 개
최하여 학교에서 출발하여 송도 조갯골을 경유하여 송도유원지에서 유턴하여 되돌아오는 단축마라
톤 대회가 기억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운동장에서 체조로 몸을 풀고는 체육선생님이 출발을 알리는
화약총의 ‘탕’하는 소리에 맞추어 와~ 하며 일제히 쏜살같이 교문을 마치 성난 파도처럼 밀려나가면 미리 대기해 있던 교통안내 경찰차량이 선두에서 교통을 통제해 주면 우리들은 신나게 온 거리를 가득 메꾸며 송도 유원지까지 달려가곤 했다.
경찰차량의 에스코트를 받아가며 달리는 것을 뻐기고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었고 마치 무엇인가 된 사람처럼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마라톤 대회는 은근히 기다려지는 행사이기도 했었다. 일부 몇 명이 아예 조갯골의 야산으로 빠져나가 막걸리를 사서 몰래 마시고는 모든 학생들이 거의 다 유턴하여 학교로 되돌아가는 시간에 맞추어 열심히 송도유원지까지 달려온 학생들처럼 위장을 하여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다가 여지없이 학생부 선생님들에게 적발이 되어 호되게 야단을 맞고 벌을 서고 부모님에게 알리고 단단히 처벌을 받기도 했으나, 매년 은밀한 학생들 사이의 자랑거리로 저질렀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송도 유원지에서 선생님들이 유턴하는 학생들에게는 손바닥이나 손등이나 팔목에 스탬프 잉크로 커다란 도장을 팍 찍어 주었기 때문에 골인지점에 도착했을 때 팔목 도장이 없는 학생은 일단 마라톤 불참을 의심받았었고 간단한 조사로 불참을 확인하고 는 처벌을 받았던 것이었다. 지금은 교통이 혼잡할 뿐 아니라 학생들의  체력도 많이 약해진 것 같아 마라톤 대회가 없어진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아직까지도 어깨를 으쓱이게 하며 술자리에서 좋은 이야기꺼리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인천고등교육기관 최초로 스쿨버스(School-bus)를 운영하여 등하교를 하여 인근의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의 부러움을 차지하곤 했던 것이다. 스쿨버스가 운행되는 것뿐만 아니라, 1973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2박 3일로 고등학생 최초의 대한항공기 편 제주도 수학여행이라는 교육계 사상 초유의 수학여행의 행사를 거창하게 가졌던 것도 자랑스런 기억이었다. 이는 인천은 물론 전국적으로 커다란 이야기 꺼리가 되었으며, 모교가 일류고교로 발돋음 하는 하나의 초석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유일하게 수학여행에 가정형편 상 참석을 하지 못하였던 나는 비록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하였지만 동기들이 제주도 수학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은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그 때 당시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가장 선진적인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모든 고등학교의 시범학교였던 것도 자랑하고 싶다.
그렇게 좋은 교육환경과 교육프로그램으로 전국적으로 아주 훌륭한 선생님들을 모시고 교육을 받았던 우리는 우쭐하면서도 학교의 명예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학문에 전념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인천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정치의 연장을 위하여 10월 유신을 위한 전국 비상계염 사태를 선포하여 모든 집회가 금지되고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유신체제의 필요성에 대한 홍보교육을 받아야 했었고 가정통신문도 유신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발송이 자주 되었으며, 반상회를 통하여 유신의 타당성을 홍보하곤 하였다.

 

 

     1974.8.15 육영수(陸英修)여사 저격사건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스운 이야기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의 건강을 위하여 점심시간에는 의무적으로 중간 체조를 시키기도 하였다. 국민체조 경음악에 맞추어 국민체조 시작~

하는 첫 구령에 맞추어 학교며 공공기관, 일반 회사에도 국민의 체력증강을 위한 체조를 하곤 하였다. 또한 전교생에게 기생충약을 복용시켰으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지겨웠던 대변 봉투에 채변하여 학교에 가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건강의 중요성을 알아서 각 가정마다 좋은 약으로 미리미리 건강을 챙겼지만 그때만 해도 정부에서 전체 학생들에게 채변검사 결과 기생충이 있는 학생에게는 의무적으로 기생충약을 복용시켰었다. 또 가정마다 쥐떼들이 극성을 피웠던 시절인지라 매월 쥐잡는 날을 정하여 ‘오늘은 쥐잡는 날’이라는 리본을 패용하고 다니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습다. 

 

사회적으로 또 하나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기념식장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조청련계의 재일동포인 문세광에 의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저격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누가 이야기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분개하여 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어 일본 규탄대회를 가졌었다.
운동장에서 일본의 만행에 대한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하자! 일본은 즉각 사과하라! 일본인들은 대한민국을 떠나라! 

     1974.8.19 육영수여사 장례행렬 모습

구호를 외치며 거리 행진을 하려는 태세에서 선생님들의 만류로 일단 진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조국을 생각하고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애국심의 발로라고나 할까? 우리가 선두로 규탄대회를 가져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국적으로 이곳저곳에서 규탄대회가 열리며,

전국이 국모를 잃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육영수 여사님의 빈소가 차려지고 우리는 서울 광화문에 차려진 빈소를 찾아 오르내리며 국력을 튼튼히 세워야 하겠다는 어린 결심을 하며 고3 2학기를 맞이하였다.

그러한 일들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의에 맞서는 피 끓는 용기, 용맹, 혈기였다고 생각해 본다.

그러한 왕성한 혈기로 애국애족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교의 대선배로서의 위상은 조금 세웠다고 자부하고 싶다.

 

<인하 50년사 발췌>

 




 

졸업생 이미지

성명 전정배

직업 제14~15대 총동문회장

졸업회수 8회

졸업연도 1982년

남기는 글

 

함께한 50년, 함께할 50년
仁荷 100년을 준비하다

 


용마루에 작은나무 仁荷
1972년 봄
인하나무에 이름표를 달고
해풍에 갯내음이 짙게깔린 용마루에 희망나무 仁荷를 심었네
사계절을 200번 넘게 보냈고
혹독한 비바람
차디찬 추위에도 잘도
커왔네
함께한 50년
그 발자취를 나이테에 새기며 용마루 에 우뚝선 仁荷나무
함께할 50년
품격있는 인하부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인하부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인하부고
세대초월
친구같은
선후배로
참 眞자 용마루에
화려한 꽃과
열매를 맺어라
함께한 50년, 함께할 50년
인하 100년을 벅차게 준비하고 달려가자

 

[인하 50년사 발췌]

 

성명 이종일

직업

졸업회수 5회

졸업연도 1979년

남기는 글

봄, 여름, 겨울 그리고 가을 76-79년의 기억들

 

봄, 1학년
1976년 3월의 봄은 따스했다. 입학식을 치르자마자 우리는 설레는 해방감으로 자유를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른 학교를 배정받은 친구들이 자기 학교를 교정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으로 부를 때, 적어도 우리학교는 캠퍼스라고 으스댔다.

인하대학교와 인하공전이 한 울타리 안, 그것도 지척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약간의 근거만 있어도 일방적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 진실로 자리 잡는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우리 학교가 달랑 5층짜리 건물 하나였지만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잔디밭은 점심시간마다 청춘의 해방구였고, 심지어 까다로운 교감선생님조차 출입을 막지 않으셨다. 지역의 다른 고등학교와는 차별되게 주어진 어줍잖은 자유가 우리 1학년의 마음에 가득 찼다.

 

운동장 조회(1970년대 후반)


어쩌란 말인가! 채 한 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우리 자체가 캠퍼스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을. 중딩을 갓 면한 떠꺼머리 10대의 눈에는 머리를 기를 수 있고, 등교 때에도 생활지도 자체가 없고, 교문이 4개 이상이며, 오가며 들이마시는 여대생들의 체취는 커다란 행복감을 주었다. 4월이 지나면서 일부는 점심시간에 인경호를 탐색하고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는 대담함을 보였다. 가끔 장충체육관으로 배구응원을 가기도 했으나 이미 자유를 만끽하던 우리는 서울 구경이 주는 새로움에 곧 시들해졌다.

봄은 따사로웠으나 짧았다. 자유를 만끽하고, 친구와의 대화를 즐길 수 있던 입학 후 1년은 너무도 짧았다. ‘관계 대명사’ 뒤를 잘라서 주어와 동사를 찾으라던 영어선생님의 외침만큼이나 단발마 같은 1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용마루 예술제 전시(1970년대 후반)

 

여름, 2학년
2학년에 올라가자 1반과 7반이 생겼다. 그 당시에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우리는 수정체처럼 난생 처음 세포 분열을 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운명이 상당부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문과와 이과, 우반과 열반의 구분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질투나 시기가 우리에게는 아직 없었다.
같은 친구와 같은 선생님들을 매일 보면서 강제적 분리이든 규칙이든 간에 사회가 만들고 학교가 준수하는 것일 뿐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다. 당시 감정의 분출구였던 시화전(詩畵展)이 그 정점에 있었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고,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그림을 그리던 친구 중의 하나는 지금 어엿한 화가가 되었고, 시를 썼던 어떤 녀석은 지금 논문을 쓰느라 고생을 하고 있다. 이상한 인형을 흔들며 노래해 여학생들로부터 가장 많은 환호를 받던 그 카수가 ‘나는 가수다’에 나왔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서울 여학생들마저 초대해 인하대학캠퍼스에서 열었던 시화전은 ‘인하부고 2년생의 인하캠퍼스 정복 작전’에 다름 아니었다.
선생님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여학생들과 함께 어색함과 소란스러움으로 인경호를 가득 채웠다. 우리는 이미 대학생이었다. 물론 다가올 겨울의 혹독함을 알지 못했지만 화장실에 다녀오는 친구들의 몸에서 ‘구름과자 냄새’가 짙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2학년 1학기 때만 해도 몇몇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Crazy dog’에 물렸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상처가 남았다는 후일담은 없다. 당시에는 심각했으나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는다.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지루한 여름 장마는 쉽게 잊혀지고, 무더위만이 기억에 남는 법이다. 시간은 기억을 퇴색시키고 본질만을 간직하게 마련이다. 특히, 폭풍 같이 순수할 때의 기억은 더욱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면, 2학년 때의 기억은 공부도 자유도 아닌, 목적 없는 열정이었다. 무엇을 열심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취향대로 그저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두해 있었다.


겨울, 3학년
우리가 겪은 1978년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침묵’이다. 3학년 교실에는 봄이 절대 오지 않을 것처럼 찬바람이 불어 적막이 감돌았고, 수업시간의 선생님 목소리는 낮을수록 더욱 잘 들렸다. 쉬는 시간조차 책을 보거나 자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적막강산에 다름없었다. 대부분 도시락을 두 개 정도 싸가지고 다녔고, 어떤 친구는 3개를 가지고 다녔다. 도시락에 밥만 가지고 와서 학교 뒤에서 국물만 사서 먹거나 친구들로부터 반찬을 모아 풍성하게 먹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점심시간이 주던 생동감은 이미 대학입시라는 중압감에 눌려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도시락을 수시로 해치우고 수학 문제의 해법을 친구에게 묻는 녀석들이 많아졌다. 오전수업만 하고 쑥스럽게 빠져나가는 취업반의 장발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하교 시간조차 이미 그 의미를 잃었다. 몸보신 한답시고 자취하는 친구 집에 모여 달걀 한 줄을 끓는 물에 왕창 넣었다가 터져버린 달걀을 두 개도 못 먹고 결국 다 버렸다. 그만큼 불안했고, 그만큼 어설펐고 절
박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교사 앞 잔디밭에 앉아 영어단어장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달콤한 축복이었다.
그 무렵 우리는 이미 닳아 해진 성문종합영어, 해법수학, 최종점검 등을 부여잡고, 교실안에 유령처럼 앉아 있었다. 공부와 시간을 위해 스포츠형이나 속칭 ‘이부가리’로 머리를 깎아 반항 아닌 반항하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눈썹을 밀어서 강한 의지를 표현하는 녀석이 주목 받기도 했다. 선생님들이 더 이상 멀거나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친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때가 이 무렵이었다. 물론 몇몇은 담배에 이어 술과 같이 또 다른 금단의 열매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학익동 경험’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너무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친구도 있었으나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겨울 내내 내린 눈으로 소리조차 얼어버린 산속의 겨울처럼 고요함이 교실 안에 첩첩이, 그리고 우리 마음에 수북하게 쌓인 그런 시절이었다.

 

도서반(1970년대 전반)
고2 수학여행(1976)

가을, 졸업 후
우리가 치열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무렵, 그리스 사제 비슷한 복장을 한 루소스(Demis Roussos)라는 가수의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이라는 노래가 우리의 심정을 깊게 파고들었다. 가사의 내용을 아직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자연의 법칙을 애절하게 말해 주는듯한 짙은 목소리만으로도 우리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1976년에 입학해 따스한 1학년, 화려한 2학년을 거쳐, 겨울 같은 3학년을 지낸 후 각자의 길로 나선 우리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노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후 우리가 걸었던 길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각자 대학으로, 사회로 나갔고, 그 후에는 나름대로 다양한 직장을 구해서 나름의 업으로 삼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전국 각지도 모자라 세계 여러 나라에 나가 사는 친구들도 생겼다. 모두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삶을 살고 있지만 단 한 가지, 우리가 봄, 여름 그리고 겨울을 같이 보낸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인하부고 5회 졸업생이라는 명찰을 심장 한 켠에 판막이처럼 달고 산다. 몸뚱이를 혼자 감당하는 심장처럼 ‘인하부고 5회’라는 DNA는 이미 30년 이상을 우리 몸의 일부로 지냈고, 오늘도 화려한 복제를, 그리고 가을의 열매를 꿈꾼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가을에 서 있다. 가을꽃은 여름 꽃보다 화려하다. 향기와 자태를 뽐낼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이다.


‘봄, 여름, 겨울 그리고 가을은 모든 것 안에 있습니다.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 are in everything)’라는 루소스의 노래가사처럼 우리는 가장 순수했던 시간을 치열하게 불살랐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수확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한 공간에서 봄, 여름, 겨울을 같이 보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공유한 봄, 여름, 겨울에 이어 이제 인생의 가을을 자발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인하 50년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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