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학교사범대학
부 속 고 등 학 교설립배경 및 창학정신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는 학익동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옛 인천의 향수도 달래볼 겸 먼저 용현벌과 학익동의 지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용현동에 대하여…
용현동은 예전에 비랑이 혹은 비랭이라고 불렸다. ‘비랑’이란 ‘파도(浪)가 난다(飛)’는 뜻으로 쓰였다고 전해지긴 하나 ‘비탈진 곳’이라는 해석이 더 우세하다. 용현동의 대표적인 비탈길은 흔히 얘기하는 ‘독쟁이’ 고개다. 독쟁이는 발음 편의상 독정리에서 파생한 명칭이다. 독정(讀亭)은 책을 읽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곳은 배산임수의 땅 모양이다. 수봉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승기천이 흐르며 멀리 인천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양지바른 기슭이었다. 책 읽기에 알맞은 정자가 들어서기에 딱 좋은 곳이다. 훗날 인하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게 되며, 본교가 터를 닦으니 이는 역사적으로도 이미 정해진 학문의 전당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해본다.
용현벌은 온통 미나리밭과 배추밭이었으며, 6.25 동란 이후에는 잠시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 허허벌판에 1954년 4월 24일 인하대학교의 상아탑이 세워졌다. 당시 미국의 MIT 공과 대학에 버금가는 대한민국 최일류의 공과 대학으로 출범하여, 공업 입국의 초석을 굳건히 다지며 과학 기술 인재와 산업 역군을 배출하고 있는 국내 명문대학으로 발돋움 하게 됨으로써 현재는 민족의 자긍심이 서린 명문대학으로써 인천을 대표하는 교육 기관으로 역사적인
기념물이 되었다. 인하대학교를 중심으로 용현벌에 있는 역사적 기념물 한두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한다.
인하대학교 캠퍼스 바로 옆에 있는 인하공업전문대학교 7호관 뒤에는 중요한 국가시설이자 문화재가 자리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첨성대처럼 보이는 3m 46㎝ 붉은 벽돌의 원통형 건축물은 ‘수준원점(水準原點)’이다. 이 수준원점은 대한민국 지형 높이의 기준점이 된다. 바다로부터의 높이를 말하는 해발의 기준점이 바로 이 수준원점이다. 원래는 당시 바닷가였던 중구 항동 1가 2번지에 설치했었다. 하지만 바다 매립이 계속되자 이 수준원점을 더 이상 바다 옆에 두기 어렵게 되었고 육지 안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됐다. 이때 이전 대상지로 떠오른 곳이 인하공업전문대학 캠퍼스였다. 지반이 평탄하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수준원점은 1963년 12월 항동 바닷가에서 인하공전으로 옮겨졌다. 비록 국립지리원의 관리 대상물이지만 학생들은 국내 유일의 수준원점이 학교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인하대와 같은 울타리에 있는 정석항공고등학교 뒷문 건너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원인 해성보육원이 있다. 이 보육원은 우리나라 개화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다. 프랑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1894년 가을 길거리에 버려진 4살과 12살 된 여자아이와 이듬해 4월 2살 된 남자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답동성당 내에 해성보육원을 설립했다. 광복 이후 고아의 수가 급격히 늘자 보육원은 1948년 현재의 자리에 용현동 분원을 설치했다. 6·25전쟁 때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200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송도와 덕적도 등으로 피란을 다녀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보육원을 재정비하고 1975년에 아예 보육원 자체를 용현동 분원으로 이전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용현동 골목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념물이 있다.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는 시·도기념물 제4호인 이윤생·강씨정려(李允生姜氏旌閭)가 있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동네에 세운 건축물이다. 1604년 용현동에서 태어난 이윤생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인근의 낙섬으로 들어가 강화도에서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면서 청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다시 청나라 대군이 침입하자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도 곧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후에 철종은 정려를 내리고 그를 좌승지에 강씨를 숙부인으로 봉했다.
학익동에 대하여
학익동은 문학산의 한 줄기인 학익산 아래에 위치한 동네이다. 구한말까지는 지금의 용현동 일대와 함께 묶여 비랭이 또는 비룡리라 불리던 곳이다. 제운리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중기에 이 마을에 살았던 부평 이씨 집안의 학자 이세주의 호를 딴 것이다. 학익리라는 이름은 1910년대에 들어와 처음 쓰인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연경산이라고도 불리는 학익산을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해서 붙였다는 설명이다. 한편 이 동네는 학익산과 문학산 주봉이 마치 두 날개처럼 펼쳐 감싸고 있는 모습이라 하며, 동네 이름도 학골 또는 학산 등으로 불렸다.
이 곳 학익동에서 문학동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도천이 고개 또는 도천현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고개가 있다. 그 발음이 조금 바뀌어 대천이 고개, 도차니 고개로도 불렸는데 이는 모두 옛날 이곳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도천단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전한다. 이 고개 아래에는 조선시대 인천의 중심지인 도호부가 있었는데 현재(인천 월드컵경기장 맞은편) 인천시가 당시의 모습을 재현,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
도천이 고개 입구에는 예전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도천현 반석’이라 불렸던 이 바위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선 무렵, 그곳 조정에서는 조선의 산세가 좋은데다 서기(瑞氣)까지 뻗쳐 장차 나라가 크게 강해질 것으로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에 조선의 산세를 죽이기 위해 이름난 지관을 보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산의 혈맥을 끊어버리게 했다. 땅의 정기를 누르고 큰 인물이 태어나는 것을 미리 막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지관은 이곳 도천이 고개에 이르러서는 산세가 좋은 것을 보고 쇠기둥을 땅 속 깊이 박은 뒤 쇳물까지 끓여 붓고, 원래 건너편에 있던 이 바위를 가져다가 기둥 위에 눌러놓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7대 어향’이라 해서 여러 명의 왕비를 배출했었고, 그를 통해 대각국사 의천 같은 인물을 낳기도 했던 문학산 주변에서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인물이 나오지 못했다는 얘기다. 또 이 반석이 원래는 도천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상석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한편 이 산 기슭에는 조선 숙종 때 학산서원이 생겨 대대적인 사원 혁파작업이 벌어지는 고종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도 했으며, 그보다 훨씬 이전인 고려 때는 현재 학익초등학교 자리에 학림사라는 큰 절도 있었다. 문학산에 오르면 현재 옛 문학산성 일부를 복원해 놓았는데,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일제 때 이전까지는 학익산 아래 학익동은 바닷물이 넘나드는 곳이었기에 배를 이용한 외적들이 문학산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한 산성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문학산 기슭의 학익동 용현벌은 역사적으로 볼 때나 여러 정황으로 살펴보더라도
운명적으로 배움의 터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간직한 위치에 인천 교육의 중심인 인하대학교가 설립되어 많은 인재 양성을 해왔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보면서 그 역사의 숨결이 깃든 곳에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인하대학교의 유래와 더불어 인하대학교의 설립과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인하대학교 설립동기와 설립당시의 미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시대 독립운동의 해외 본거지 하와이
미국의 남북전쟁 전후로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산업이 확대 되고 있었는데,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럽에서 노동력을 충당 하려 했다가 여의치 않아 아시아에서 노동력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늘어나는 중국인들이 불안해진 미국 정부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1880년대부터 일본인들을 이민 노동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의 수 또한 늘자, 이번에는 일본인을 견제할 저임금 노동자로 한국인을 발견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협회의 요청을 받은 미국의 알렌 박사가 고종에게 건의해서 한국인의 미주 이민 사업이 진행되었다.
미국인 ‘제슈’가 인천에 ‘동서개발공사’를 만들어 하와이 노무자를 모집하였는데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 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지만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았다. 이민자 모집에는 어려움을 알고, 당시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국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인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와 선교사들이 “하와이는 살기 좋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이라고 한국인들을 설득시켜서 다수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121명의 첫 이민 신청자들 이 생겨났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당시 하와이 측의 제안은, 가난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에게 일확천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최초로 121명이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 13일 갤릭(Gaelic)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드디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정해진 농장에서 주인이 만들어준 번호표를 하나씩 목에 걸고 지냈다는데, 당시 말이 통하지 않던 시절에 오로지 목에 걸고 있는 번호표만이 자신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감옥에 갇힌 죄인의 수인번호처럼 말이다.
그 후 1905년 까지 65차에 걸쳐 7천명이 넘는 한국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처지는 노예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 이들 이민 1세대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도 짓고, 교회도 건설하여 독립운동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금을 하여 한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하와이에 한국인 거주자가 많이 생기자 하와이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주요 해외 본거지가 된다.
인하대학교와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인연
하와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교민들은 교회마다 한글학교를 만드는 등 교육열을 과시하며 여러 학교들을 설립했다.
당시 미국감리교회가 통제하고 있는 중앙학원의 이념은 미국사회에서 이바지 할 수 있는 한인 청소년 양성에 있었지만, 이와 뜻을 달리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며, 중앙학원의 원장직을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인기독학원(Korea Christian Instiute)을 하와이에 설립하였다. 한인 기독 학원에서는 매년 80 ~ 90명의 학생들이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학원의 설립 자금은 한인 사탕수수 노동자, 한인 상인, 사업자, 감리교회 재단에서 협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1919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되어 학교 운영에 전념하기 어려워 졌으며, 또한 교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자 학생들은 미국 공립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한인기독학원은 그 필요성의 희석되고 학생 수는 계속 감소해 1947년 폐교되었다.
한국 이민사와 길을 함께한 인하대학교
하와이 이주민 교포들은 1950년 한인기독학원의 학원 부지와 재산을 15만 달러에 매각하였다. 교포들은 그동안 독립자금으로 보내오던 자금 중 남겨진 자금과 학교 매각 대금 15만 불 사용에 대한 논의를 거쳐 전쟁으로 황폐화된 고국을 재건하자는 데에 뜻을 모아 후세를 위한 교육시설을 만들기로 결정을 하게 되었으며 “한인기독학원 판매대금을 조국의 공과대학 설립기금으로 보내고 싶다"는 뜻을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 국책사업으로 공과대학을 설립해 기술자를 양성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하와이 교포 이주 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사업으로 인천시에 공과대학을 설립하고자 발의하여 인하대학교 설립 기성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2월 피란지 부산에서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천에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과 같은 최고 수준의 공과대학을 인천에 설립하고 싶다."
인천은 다수 하와이 교포들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공업단지가 들어서는 등 공대 설립의 장점이 많았다. 이에 문교부는 1953년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 서울대·연희대(현 연세대) 총장 등 인사 47명으로 학교 설립위원회를 만들었다. 한인기독학원(9만 7124㎡) 매각대금 15만 달러, 정부 국고보조금 6000만환, 국내 기업인 등의 민간 기부금 2774만환, 국민성금 등으로 2억 5000만환(당시 약430만 ~ 440만 달러)을 마련했다. 인천시는 부지 41만 3223㎡를 무상 제공했고, 1954년 드디어 ‘인하공과대학'이 개교했다.
인하대학교는 ‘인천 하와이 대학교’의 줄임말이며,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진 학교라는 의미로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한국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바라봤던 고국 땅인 인천(仁川)의 仁과 하와이(荷蛙伊)의 荷자의 첫 글자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0년 하야할 때까지 매년 인하대 입학식과 졸업식을 찾았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으나,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 뒤엔 학교 재단이 와해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8년 당시 한진상사 주식회사(현 한진그룹) 조중훈 이사에게 “조중훈 이사는 인천이 고향이니 재단을 맡아 달라"고 해 재단이 다시 설립되었고, 1968년 9월에는 한진상사(주)로부터 2억 원의 기금을 기증받았고, 인하학원의 운영을 충실히 하기 위해 이사진을 개편, 한진그룹 故 조중훈 명예회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성좌경 박사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하학원의 운영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최신식 실험실습 및 연구기재의 신규 도입은 물론, 교사, 연구실험실, 실습공장, 선형시럼수조, 도서관 및 체육관 등의 시설을 신축하고 우수 교수진을 확보하여 한국 산업 발전에 이바지 하여 왔다. 이 같이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해온 인하공과대학은 그 규모와 시설에 있어서 단과대학으로서의 규모를 훨씬 능가한 것이었고 1970년대 초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명실공이 민족의 혼이 서린 한국의 인류대학으로 발돋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인가를 받고 1968년 3월 인하공과대학교 설립 당시의 도서관과 강당 자리에 인하학원(仁荷學園) 故 조중훈 재단 이사장님의 창학 이념인 창의(創意), 근면(勤勉), 봉사(奉仕)의 창학 정신을 교육이념으로 하는 인하공과대학 부설중학교가 설립되어 3월 3일 개교식과 입학식을 하게 되었다. 초대교장으로 故 박용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참되고 바른 품성을 갖춘 건강한 민주시민을 육성하며 미래사회를 선도해 나갈 주역들을 배출하는 인재양성의 교육에 전념하여 명문 사학으로서의 이름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인하대학교를 배경으로 체계적인 교육기관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교육입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중학교의 설립이 절실해짐에 따라 1968년 11월 20일 학년당 5학급 총 15학급의 설립 인가를 받고 1968년 3월 인하공과대학교 설립 당시의 도서관과 강당 자리에 인하학원(仁荷學園) 故 조중훈 재단 이사장님의 창학 이념인 창의(創意), 근면(勤勉), 봉사(奉仕)의 창학 정신을 교육이념으로 하는 인하공과대학 부설중학교가 설립되어 3월 3일 개교식과 입학식을 하게 되었다. 초대교장으로 故 박용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참되고 바른 품성을 갖춘 건강한 민주시민을 육성하며 미래사회를 선도해 나갈 주역들을 배출하는 인재양성의 교육에 전념하여 명문 사학으로서의 이름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인하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 인가를 받은 다음 곧 이어 1971년 12월 24일 조국의 부강과 민족의 번영을 염원하며 각 학년 당 보통과 3학급, 화공과 1학급 총합 12학급의 설립 인가를 받아 인하공과대학 강당 A, B동 건물을 보수하여 인하종합고등학교의 교명으로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1972년 3월 2일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으로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故 박용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참되자(眞)”를 교훈으로 애국애족하는 자유 민주인, 실력 있고 창조적인 사람, 봉사하는 사람, 예의바르고 신뢰받으며 품위있는 사람, 건강하고 진취적인 사람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창의(創意), 근면(勤勉), 봉사(奉仕)의 창학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인격 도야, 진리 탐구, 사회 봉사의 교육이념으로 미래 사회를 선도해 나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72년 3월 6일 고등학교 입시 전형을 거쳐 240명의 신입생들을 선발하여 개교식 및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동년 6월 26일에 당시 혜성보육원이 있던 자리 3,967㎡의 대지에 4층 짜리 초현대식 건물로 본관 교사를 준공하였으며, 1973년에 인하대학교에 사범대학이 신설되면서 학교명을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변경하여 완벽한 고등학교로서 면모를 갖추어 출발하게 되었다. 미래의 주역이 될 인재들을 양성하여 1975년 2월 25일 제1회 졸업식을 갖게 되어 229명의 사회의 역군인 인재들을 배출하여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88년 8월 25일 인하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던 학교를 인천 직할시 남구 학익동 현재의 교사로 이전하여 대지 19,051㎡에 지하 1층 지상 5층의 최신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여 교사를 이전하였다. 동년 11월 10일에는 각 학년 당 9학급 총 27학급의 증설 인가를 받았으며, 1989년 2대 교장으로 강황규, 1992년 3대 교장으로 조상원, 1997년 4대 교장으로 조상원 교장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2002년에는 지상 4층 연면적 1,416㎡의 신관을 증축하였으며, 2005년도에는 각 학년당 10학급, 합계 30학급으로 증설 인가를 받았다. 2003년에는 5대 교장으로 최광주, 2009년부터는 6대 이효건 교장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인하부고는 인천 사학의 명문 고교로서 학생에게는 꿈을, 교사에게는 보람을, 학부모에게는 만족을 주는 학교를 만들어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5대양 6대주를 향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교육의 전당으로서 미래 교육을 선도하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도록 학력 향상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본교의 교훈은 “참되자(眞)” 이며. 교육 목표는 ‘1)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봉사인, 2)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따뜻한 건강인, 3) 자기 주도적 학습을 통한 실력 있는 실력인, 4) 창의력을 발휘하여 미래를 개척하는 창의인, 5) 국제사회를 이끌어갈 능력 있는 세계인을 기른다’이며, 교목을 강인한 정신과 봉사를 의미하는 느티나무로, 교화를 선진적 정신을 나타내는 목련으로, 진취적인 기상을 뜻하는 감청색을 학교의 색(色)으로 삼고 있다.
정성껏 가르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으뜸학력 인하사대부고는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인재들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창의(創意)-후학(厚學), 근면(勤勉)-자립(自立), 봉사(奉仕)-공영(共營)을 창학 이념으로 삶았으며, 현 조양호 이사장님은 제2의 건학 정신 구현으로 “창조적 선진경영(創造的 先進經營)”을 강조하여 국제화 시대의 주역이 될 실력 있고 예의 바른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 바른 인성을 갖춘 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근 ‘Clean campus, Elite students, Great school(깨끗한 교정, 훌륭한 학생, 최고의 학교)’를 구호로 내걸고 세계를 선도하는 인천의 명문 사학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인하부고는 2012년 2월 현재 제38회 졸업식을 거행하여 총 15,0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은 사회의 각 요소요소에서 자기의 몫을 다하며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는 역군들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