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페이지 사진2

인하40주년(2003~2012)

  • 2004학년도 주요 행사 2004.01
  • 제4대 김종렬 교장선생님 퇴임식 2004.02
  • 2004학년도 입학식 2004.03.02
  • 2004 춘계 남여 중고 배구대회 우승 2004.03.19

    [경인일보] 인하사대부고, 접전끝에 우승 감격 - 중고배구 - 2004.03.20

    인천 인하사대부고가 2004 춘계전국남녀중고배구연맹전에서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인하사대부고는 19일 동해체육관에서 열린 올시즌 첫 전국대회 남고부 결승에서 이번대회 수비상을 받은 레프트 최귀엽(3년)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대전 중앙고를 풀세트 접전끝에 3-2(26-24, 27-25, 25-27, 19-25, 15-11)로 제압,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98년 전국체전 우승과 르메이에르기 우승 이후 6년만에 고교배구 최강에 등극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인하부고는 총 선수 11명의 적은 선수들로 어려운 경기를 펼친 끝에 우승을 차지해 남다른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이날 좌우 공격수의 파괴력을 앞세운 인하부고와 강서브를 앞세운 중앙고는 1~3세트를 연달아 듀스까지 몰고가며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수비와 짜임새에서 한발짝 앞선 인하부고가 힘겹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한편 이번 대회에서 인하부고는 최우수감독상에 김갑제 감독이, 최우수선수상에는 팀 주장인 정지혁, 세터상에는 하성래, 수비상에는 최귀엽이 각각 선정됐다.

  • 재계 인물현대사 - 수송한국의 巨木, 조중훈 2004.03.20

    [문화일보] ‘인재양성’ 일념 私學에도 아낌없는 지원 - 2004.03.20

     

    지난 17일 인천 남구 용현동에 자리잡은 인하대 교정에는 찬바람 속에서도 봄기운이 완연했다. 언덕배기의 진달래는 꽃망울을 머금었고, 키 큰 소나무가 즐비한 ‘하이데거의 숲’에도 파릇파릇싹이 돋고 있었다.

    정문을 마주한 본관 건물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화사한 대리석으로 새단장했다.

    인하대가 자랑하는 도서관은 교정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건물의 외형은 양쪽에 스피커를 달고 사각형 학사모를 눌러쓴 오디오 모양이다. 건물 입구 오른쪽에 ‘정석학술정보관’이라는 건물의 명패가 보였다.

    조중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던 2001년 자신이 직접 구상한 정석학술정보관을 착공했다. 미국의 유명 건축업체인 GWA가 설계를 맡은 이 건물은 3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지난해 9월 17일 완공됐다. 그러나 조중훈은 자신의 마지막 정열이 담긴 도서관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2002년 11월 눈을 감았다. “인하대에 한국 최고의 디지털 도서관을 지어달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 되고 만 셈이다.

    조중훈이 세상을 뜨고난 뒤 장남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도서관을 완공하고 ‘Jungseok Memorial Library (정석학술정보관)’라는 정초(定礎)를 새겨넣었다.

    도서관은 지하2층, 지상6층에 연면적이 7500평으로 국내 디지털도서관 가운데 최대규모다. 장서 규모는 100만권에 달하고 각종 멀티미디어 콘텐츠 자료와 국제 회의를 위한 컨벤션 센터, 위성방송 수신설비 등이 구비됐다. 도서관 5층에는 미국 남가주대(USC)와 공동개발·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가상현실체험관도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인터넷으로 10.2채널 음향을 체험할 수 있는 ‘몰입형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디지털 도서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운영도 최첨단을 달린다. 3500개 열람석에는 인터넷을 통한 좌석예약제가 도입됐고 세계 유수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최신식 정보서비스 프로그램 ‘밀레니엄 시스템’도 설치됐다. 건물과 내부 시설에 들어간 비용은 총 473억 원에 달한다.

    정석학술정보관 1층 로비 한쪽벽에는 ‘종신지계 막여수인(終身之計 莫如修人)’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중훈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말이다

    . 중국의 고서 ‘관자(管子)’에 나오는 명언으로 ‘한평생을 살면서 가장 뜻 있는 일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는 의미다.

    맨손으로 일어나 평생을 바쳐 총 자산규모 23조5000억원, 연매출 16조원의 세계적인 종합수송물류기업집단을 일궈낸 조중훈이었지만, 젊은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 학업을 중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평생 애틋함이었다.

    기업이 육영사업과 사회환원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36년전 조중훈이 인하학원을 인수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한진상사가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항공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직전인 1968년, 조중훈은 정부로부터 “인하공대를 인수해 줄 수 있겠느냐”는 뜻밖의 요청을 받게 된다. 월남전 용역사업을 통해 사업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놓긴 했지만 당시 한진상사는 이제 막 기업의 틀을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사학을 인수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천’과 ‘하와이’의 첫자를 딴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하공대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교포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범시킨 학교다. 한국의 공업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취지아래 넉넉한 정부 보조금과 하와이 교민들의 후원을 받아 건립된 인하공대는 당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문 사학’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정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인하공대는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자유당 정권출신 요인들이 계속해서 재단을 맡았지만 재정적인 지원은 없었다. 정치적 격변기속에 61년부터 68년까지 이사장만 10명이나 교체됐다.

    하루 품삯으로 70센트를 받았던 하와이 이민 1세대가 고국의 교육발전을 위해 15만달러의 기금을 쾌척해 지은 학교가 애물단지 로 변해버린 것이다.

    조중훈은 하와이 교민들의 땀과 눈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부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인천은 조중훈이 한국전쟁 직후 한진상사의 첫 사무실을 연 곳으로, 한진그룹에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중훈은 자서전에서 “그무렵 나는 한일개발의 설립과 인천 민자부두 건설계획 등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 사학운영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시기였다. 그러나 ‘언제든 여유가 있을 때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는 평생토록 좋은 일 한번 하기도 어렵겠다’는 마음에서 맡아보기로 결심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68년 9월 인하공대를 인수한 조중훈은 우선 2억원을 기증해 교육 환경 개선사업에 착수했다. 당시 7만평 인하대 캠퍼스에는 부지 곳곳에 무허가 판자집과 기와집이 50여채나 들어서있을 정도로 주변 환경이 어지러웠다. 조중훈은 판자집 주민들에게 일일이 이주비를 보상해주며 면학 환경을 조성해 나갔다. 조중훈이 재단을 인수한 지 3년만인 1971년 12월 인하공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인하공과대학 부설 중앙종합직업학교(현 인하공업전문대학)도 체계적인 기틀을 갖춰 나갔다. 70년 2월 인하공업전문학교로 개편 인가를 받은 뒤 매년 주요학과의 증원과 신설이 이어졌고 76년에는 오늘날 인하공전의 간판학과가 된 항공운항과가 신설됐다.

    인하대는 교육의 중심이 서울에 과도하게 치우쳐있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대학중 유일하게 국내 10위권 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87년 통상물류전문대학원을 설치한 데 이어 올해는 국내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물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물류 분야에 대한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조중훈이 지난 36년동안 인하학원에 지원한 금액은 4100억원에 달한다. 조중훈은 이밖에도 생전에 자신의 사재 대부분인 1000억원(한진그룹 계열사 보유주식 502만주와 부동산)을 학원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증해 수송물류 및 육영사업에 쓸 수 있도록 했다.

    사재를 털어가며 아낌없는 투자를 했지만 조중훈은 자신이 인하학원에 기울인 정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칭찬을 받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철학 때문이다. 그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기업이 사회환원 사업을 과시하는 것을 꺼렸고, 교육의 내용이나 학교의 운영에 있어 철저하게 독립성을 보장하려 애썼다.

    인하대 조석연 대외협력처장(환경공학과 교수)은 “다른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학과 인하대의 차이점이 있다면, 한진그룹에서는 인하대에 적극적인 지원만 할 뿐 간섭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격변기와 외환위기 등을 거치며 적지않은 기업과 자본가들이 사학재단을 등졌던 반면 한진그룹만은 지난 68년이래 36년에 걸쳐 단 한번의 부침도 없이 매년 100억~300억원에 달하는 투자를 계속해온 것도 유별난 점이다. 적지않은 사학 운영자들이 거액의 기금만 던져놓고 경영은 방치했던 것과 달리 조중훈은 수시로 인하대 캠퍼스를 찾아 학생들에게 “넓은 세상을 둘러보며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88년 인하사대부중과 사대부고의 교사 신축공사 당시의 일화는 그가 사학운영에 기울인 각별한 애정을 말해준다. 당시 조중훈은 공사가 어렵다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축 부지로 시유지였던 남구 학익동의 돌산을 사들였다. “시야가 탁트인 곳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공부하는 학생과 빌딩숲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공부하는 학생과는 호연지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인천시내와 앞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 곳에 학교를 지을 것을 고집했다.

    화강암산을 깎아 학교를 짓는 과정에는 1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가 투입됐고, 기초공사에만 1년 이상이 걸렸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중훈은 매주 현장을 찾아 진척 상황을 점검하고 직원들을 독려했고, 황혼기에 접어든 90년대 후반까지도 수시로 학교를 찾곤 했다. 예고없이 찾아온 조중훈을 맞는 것은 당직교사들의 일과중 하나였다.

    인하사대부중 이성인 행정실장은 아직도 생전 마지막으로 학교를 찾아온 조중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97년 7월 오후 1시쯤, 학교에서 일요당직을 서고있는데 회장님께서 지프를 타고 갑자기 찾아오셨습니다. 저에게 같이 학교를 한번 돌아보자고 하시더군요. 거동이 불편하셔서 학교 뒷동산에 멈춰 차에서 내리실 때는 제가 직접 부축을 해드려야 했습니다.

    ” 이 실장은 “힘든 몸을 이끌고도 학교를 구석구석 돌아보며‘부족한 시설은 없느냐’고 물어보시던 회장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인재 양성은 조중훈에게 평생 공들여 가꾸고 보살펴야 하는 인생의 ‘업’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가 반평생에 걸쳐 소리없이 뿌 려놓은 육영사업의 씨앗은 올해로 개교 50주년을 맞은 인하학원의 교정 곳곳에서 조용히 그 열매를 맺고있다.

  • 특별활동 2004.04
  • 교내 체육대회 2004.04.27
  • 스승의 날 행사 2004.05.15
  • 수학여행 2004.05.23
  • 1학년 야영 2004.05.24
  • 봄 소풍 2004.05.24
  • 용마루 예술제 2004.09.03
  • 졸업여행(설악산) 2004.11.24

검색하기